램자이어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심포지움을 기획해 주신 국제역사논전연구소의 여러분, 나데시코액션의 여러분, 이번 심포지지움 개최에 관대히 후원해 주신 산케이신문, 그리고 바쁜 와중에 모여 주신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전혀 모를 정도로 황망합니다. 이렇게 저명한 선생님들께서 모여 주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과제는 저도 아니고, 제가 쓴 8페이지짜리 논문도 아님은 명확합니다. 단순히 한 사람의 교원에 대한 괴롭힘의 문제도 아니며, 그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성실하고 꼼꼼히, 포괄적이면서도 가능한 편향됨 없이 전하는 것, 학문의 자유를 철저히 지키는 일이 오늘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서 제가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다행으로 여깁니다. 역사를 성실히 전하기 위해,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가능한 열심히 해 보고자 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고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겠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성실히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입니다.
오늘 주제에서 다루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과거의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며,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만, 무엇인가를 발표할 때나 논문이나 기사를 쓸 때, 가능한 치우침 없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며, 현재의 뉴스를 보고할 대에는 가능한 편향됨 없이 보고하는 것이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당연한 일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제로 돌아가 보면, 1930년대의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성실히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발표한 짧은 논문을 쓰게 된 계기도, 영어로 된 문헌을 읽고 매우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읽더라도 한국의 ‘반일(反日) 편향’이 반영돼 있다든지, 또는 미국 인문과학 학계의 ‘반일 편향’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읽히는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이번 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서술할 때,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이것은 쓰고 다른 것은 쓰지 않는다든지, 학계의 유행을 좇아 쓰고 싶은 대로 쓴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상태가 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두 번째는 ‘학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입니다.
성실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정치적으로 불리한 논문이라고 하더라도 발표할 수 있는 것이 ‘기초’가 됩니다. 결국 미국 학계에서는 적어도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태껏 여겨 왔습니다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이번 논문에 관한 맹렬한 반발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정도 반발은 있을 것이라고, 각오는 물론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격렬한 것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논문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강제연행설’이라든지 ‘성(性)노예설’을 반박하는 설(說)이 영어로 된 문헌으로 나타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론(異論)이나 이설(異說)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학자들의 의견이 한 가지로 통일돼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학계 내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 있다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처럼 맹렬한 반발이 있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이번에 제가 발표한 8페이지짜리 논문이 철회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같은 스탈린주의적 수단은 존재하기 어렵고, 좀체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강제연행설’이라든지 ‘성(性)노예설’을 반박하는 논문이 영어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런 설들에 반대하는 일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젊은 조교수들이 보여준 행동들을 보고 저는 절망했습니다. 학문의 자유를 완전히 무시하고 학자에 대한 ‘암살미수’와 같은 행위를 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발언들을 한 것입니다.
우선, 다양한 의견을 가진 학자들이 논문, 또는 학계 발표를 통해 서로 비판하는 것이 학문을 진전시킨다는 기초적인 원리가 무시되고 있으며, 비통하게도, 이는 우리가 지난 1960년대 학생운동에서 본 ‘무관용’을 젊은 학자들이 좇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마지막 사실은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게 쏟아진 비난들은 친구들이 없었다면 절대로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친구들, 일본의 친구들…… 그들의 격려가 매우 필요했습니다. 저를 믿어준 친구들, 안심시켜 준 친구들, “당신은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해준 친구들에게 저는 기댔습니다. 맹렬한 비판이 시작되면, 어찌 됐든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며,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비판자들이 노리는 바입니다. 의문을 갖게 해서 마지막으로는 붕괴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대혁명 때 중국 공산당이 취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재난이 시작된 직후 “이런 때에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들을 배우게 된다”고 말해 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알고 싶지 않은 것도 배우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만…… 영어에는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번역하자면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것들은 전부 유치원에서 배운다”는 말입니다. “가위를 들고 뛰어서는 안 된다”라든지 “정직하게 진실을 말한다”라든지. 현재의 일도 그렇지만 과거의 일도 과거의 일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듣고 싶지 않은 사실도 냉정하게 들어주는 것”. 그리고 “친구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것” 등 말이죠.
이번 심포지움을 열어 주신 국제역사논전연구소의 여러분, 나데시코액션의 여러분, 심포지움을 후원해 주신 산케이신문의 여러분들, 바쁜 와중에 심포지움에 참석해 주신 저명한 선생님들, 그리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존 마크 램자이어(하버드대학 로스쿨 교수) / 번역=박순종 기자 francis@pennmike.com